키클롭스의 동굴로 돌아간 세계 : 《오디세이아》로 읽는 현대의 야만
1. 문명의 가면이 벗겨진 시대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가장 핵심적인 기준은 ‘크세니아(Xenia)’, 즉 낯선 이방인에 대한 환대와 규범이었습니다. 집을 떠난 이방인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서로의 무기를 거두며, 대화로 규칙을 세우는 것.…

1. 문명의 가면이 벗겨진 시대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가장 핵심적인 기준은 ‘크세니아(Xenia)’, 즉 낯선 이방인에 대한 환대와 규범이었습니다.
집을 떠난 이방인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서로의 무기를 거두며, 대화로 규칙을 세우는 것. 그것이 고대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문명(Civilization)'의 정의였습니다. 반면, 규칙과 규범을 무시하고 오직 힘의 논리로 상대를 짓밟으며 이방인을 잡아먹는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 폴리페모스의 동굴은 전형적인 '야만'의 공간이었죠.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국제정세는 어떠합니까? 불과 얼마 전까지 인류가 자부했던 규범 기반의 국제 질서, 다자간 협력, 인권과 평화라는 문명적 약속들이 유기적으로 깨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힘이 곧 정의가 되고,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뉴스 헤드라인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지금 현대라는 화려한 외피를 입은 채 다시 '야만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서늘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2. 크세니아의 붕괴와 신자유주의적 약탈
《오디세이아》 속 키클롭스는 오디세우스와 그 일행을 향해 "너희는 어디서 온 누구냐? 무역상을 가장한 강도떼가 아니냐?"라며 환대의 의무를 거부하고 폭력을 행사합니다.
지금의 국제정세 역시 이와 닮아 있습니다.
국제법과 협약의 무력화: 강대국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국제기구의 중재나 다자간 협약을 거리낌 없이 무시합니다.
자국 우선주의와 블록화: 타국과의 상생이나 이방인에 대한 인도적 책임(난민, 기후위기 대응 등)보다는, 내 울타리를 높게 치고 상대의 자원을 약탈하거나 배척하는 '신지정학적 야만'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공존의 규범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내가 강하므로 너를 지배한다"는 지극히 원초적이고 야만적인 식인(食人)의 논리뿐입니다.
3. 사이렌의 노래와 광기의 정치
오디세우스의 귀향길을 막아선 것은 물리적인 폭력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달콤하고 치명적인 목소리로 항해자들을 유혹해 파멸로 이끄는 '사이렌'이 있었습니다.
현대 국제정치에서 사이렌의 노래는 다름 아닌 극단적 혐오와 자국 중심의 포퓰리즘입니다. 정치 지도자들과 정치적 광기는 대중의 불안을 먹고 자라납니다. "저들이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았다", "우리의 번영을 위해 상대를 짓밟아야 한다"는 사이렌의 유혹은, 합리적이고 문명적인 담론을 마비시키고 사람들을 집단적 광기로 몰아넣습니다.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몸을 돛대에 묶어 사이렌의 유혹을 견뎌냈듯, 지금의 세계에는 광기 어린 정무적 선동에 휘둘리지 않을 단단한 문명적 돛대가 실종되어 있습니다.
4. 우리는 이타카로 돌아갈 수 있는가
《오디세이아》는 단순한 모험담이 아닙니다. 그것은 폭력과 야만의 바다를 지나 마침내 질서와 평화가 있는 '집(이타카)'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간 의지의 기록입니다.
오디세우스가 표류를 끝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그저 강력한 전사여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오만을 반성하고, 지혜를 짜내며, 규범과 자제력을 회복하려 애썼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국제정세가 야만의 시대로 후퇴하고 있다는 진단은 절망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거대한 표류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문명의 품격'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기 위함입니다.
각자도생의 힘겨루기를 끝내고 다시 대화의 테이블을 차리는 것
이방인과 약자를 향한 최소한의 환대(크세니아)를 회복하는 것
자국 우선주의라는 사이렌의 노래 앞에서 이성을 지켜내는 것
외눈박이 거인의 동굴에서 탈출하기 위해 오디세우스가 '아무도 아닌 자(Nobody)'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낮췄듯, 지금의 국제사회 역시 오만을 내려놓고 문명적 성찰을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도달할 미래는 따뜻한 고향 이타카가 아니라, 끝없는 폭력이 지배하는 참혹한 바다 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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